지속가능한 건강식단 가능할까?
“나 바뀐 것 같지 않아?”
“어, 그러고 보니 좀 젊어진 것 같은데...”
프리랜서에 가까이 살아 한 달에 한두 번은 보는 친구가 며칠 전 점심을 하다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과체중인 이 친구는 그 사이 다이어트를 해 일주일 만에 체중이 3kg빠졌다는데 그 효과가 얼굴에 나타난 것 같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렇게 효과를 본 방법이 말로만 듣던 ‘고지방 저탄수화물 다이어트’였다.
이날도 점심 메뉴로 닭고기샐러드를 시켰다.
이 친구는 우연히 ‘그레인 브레인’이란 책을 읽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는데 체중이 준 건 부수적인 소득이었다.
나이가 들고 체중이 늘면서 점점 무력감과 불안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그 원인이 탄수화물이라는 설명을 읽고 식단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정말 정신이 맑아지고 안정되면서 덩달아 식욕도 떨어졌다고 한다.
처음 며칠은 탄수화물의 유혹을 참기 어려웠지만 그 고비를 넘기자 이제는 별로 먹고 싶지 않다고 한다.
특히 뇌의 건강을 위해서 고지방 저탄수화물 식단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하는 신경과 전문의 데이비드 펄머터는
달걀이야말로 이상적인 음식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간식이나 야식으로 과자류 대신 삶은 달걀을 먹으라고 제안한다.
- 위키피디아 제공
☑ 탄수화물과 지방, 입장 바뀌어
사실 오늘날 세계에 만연한 비만과 당뇨병을 비롯한 대사질환의 주범으로
정제된 탄수화물의 과다섭취(주로 가공식품을 통한 밀가루와 당류)가 주범으로 떠오른 지도 꽤 된다.
미국 뉴욕시는 탄산음료 규제 문제로 업계와 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오랫동안 주범으로 누명을 쓴 지방(특히 동물성)이 최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레인 브레인’이 대표적인 책으로 각운을 살린 원서의 제목(Grain Brain)은
곡물이 현대인의 뇌건강을 망치고 있다는 뜻이다.
신경과 전문의이자 미국영양학회 회원인 저자 데이비드 펄머터는 정제된 탄수화물뿐 아니라
곡물 자체가 건강에 안 좋고 특히 밀에 들어있는 글루텐은 장건강뿐 아니라 뇌건강에도 치명적이라고 주장한다.
필자의 친구가 이 책을 읽고 고지방 저탄수화물 다이어트를 시작한 이유다.
저자는 이참에 곡물을 식단에서 아예 빼자며 더 나아가 사람은 탄수화물을 전혀 섭취하지 않아도 되므로
탄수화물을 지방으로 최대한 대체하는 식단을 짜야 한다고 강조한다.
펄머터 박사는 오늘날 미국인들의 건강을 망치는데(3분의 1이 과체중이고 3분의 1이 비만이다) 큰 기여를 한 게
전문가들이 권장한 탄수화물:지방:단백질의 비율이 60:20:20인 식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류가 1만 여 년 전 농사를 짓기 시작하기 전의 식단인 5:75:20,
즉 인체가 진화적으로 적응한 ‘구석기시대 식단’을 지향해야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책 3부에 있는 권장식단을 보면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20:60:20은 되는 것 같다.
필자 역시 이런 방향으로 여러 편의 글을 쓴 적이 있지만 펄머터 박사는 너무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정보도 많지만 과거 ‘지방 혐오 탄수화물 예찬’의 오류를 비판하다
‘탄수화물 혐오 지방 예찬’이라는 새로운 오류로 빠진 게 아닌가 해서 씁쓸했다.
지난해 번역서가 나온 우리나라에서는 큰 반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인터넷 서점 아마존 사이트를 보면 2013년 원서가 나온 이래 여전히 베스트셀러이며 독자평이 무려 4185건이나 된다.
대략 600만 년 전 침팬지와 갈라진 뒤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식물에서 얻은 녹말은 육류에서 얻은 지방, 단백질과 함께 주요 영양원이었다.
오늘날 나미비아 수렵채취인의 식단을 조사한 결과 역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 Human Food Project 제공
☑ 구석기시대인은 수렵인?
필자가 이 책의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도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저자의 주장이 너무 완고해 때로는 사실도 서슴없이 왜곡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 구석기시대 식단도 출처가 어디인지 몰라도 엉터리다.
1만 년 전 농사가 시작되면서 인류의 식단이 곡물(주로 벼과식물의 열매)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된 건 사실이지만
그 전에도 식물 식재료가 칼로리의 최소한 절반은 차지했을 거라는 게 인류학자들의 결론이다.
말 그대로 인류는 수렵‘채취’인이었다는 말이다.
즉 곡물이 주식이 되기 이전에도 식물의 알줄기, 뿌리줄기, 덩이줄기에 저장된 탄수화물(녹말)을 많이 먹었다.
게놈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사람의 게놈을 보면 녹말을 소화하는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가 5~7개인 반면 침팬지는 2개에 불과하다.
열매나 잎에 들어있는 탄수화물은 주로 포도당이나 과당 같은 단순당이므로 이 효소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
육식과 함께 녹말이 풍부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게 인류진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을 시사한다.
식단의 선악을 둘러싼 전문가들 사이의 논란이 일반인들의 식생활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정부의 권장식단이나 언론의 보도가 큰 작용을 하기도 한다.
달걀 노른자의 콜레스테롤이 몸에 좋지 않다며
하루 한 개 이상 먹지 말고 단백질(흰자)을 위해 더 먹을 땐 노른자를 빼라는 건 잘못된 정보다.
식물성인 마가린이 버터보다 좋다는 건 터무니없는 얘기다(수소첨가반응으로 액체인 기름을 고체로 만드는 과정에서 정말 유해한 트랜스지방이 만들어진다).
틀린 구석기식대 식단을 근거로 탄수화물 제로를 지향하는 식단을 짜야 건강해진다는 주장도
마찬가지 운명이 되지 않을까.
영양학 분야에 나름 많은 시간을 투자한 필자는 요즘 ‘상식적인’ 결론에 이르고 있다.
즉 필자가 어릴 때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골고루 적당히 먹어라”가 최선의 식단 아닐까.
정제된 식재료로 만든 가공식품이 별로 없었던 때이므로 이 문구에 “가공식품은 되도록 피하고”를 덧붙이는 정도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로는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식단에서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의 비율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에도 수명과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는 발견이다.
평균수명 1, 2위를 다투는 일본과 스위스의 식단을 떠올려보라.
즉 잡식동물인 사람은 상당한 폭의 식단에 적응할 수 있게 진화했다는 말이다.
오늘날 문제의 본질은 지속적인 칼로리과잉(물론 정제된 당류와 기름 같이 비타민과 미네랄이 거의 없는 빈 칼로리(empty calories)의 비율이 는 게 상황을 악화시켰다)과 신체활동부족 아닐까.
실제 비만과 대사질환이 심각한 나라들은 하루 평균 500칼로리를 과잉으로 섭취하고 있다.
따라서 칼로리만 넘치지 않는다면 고지방 저탄수화물을 지향하는 식단도 괜찮다고 보지만(사실 탄수화물 비율을 지방 밑으로 줄이기는 쉽지 않다) 식단에서 지방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다른 영역에서 문제가 생긴다.
바로 환경파괴다. 필자의 논리전개에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사실 인류의 식단이 지구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꽤 크다.
오늘날 온실가스 발생의 25% 이상이 먹을거리와 관련된 활동에서 나온다.
또 곡물과 가축을 키우는데 들어가는 토지와 물, 비료, 농약 등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엄청나다.
이미 얼음으로 덮혀 있지 않은 평지의 절반 이상이 농업용지로 쓰이고 있다.
1칼로리(Cal 또는 kcal)를 낼 때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g. 이산화탄소로 환산).
식재료에 따라 차이가 커서 곡류(cereals)에 비해 가금(livestock)이 훨씬 많다.
가로 선은 식단에 따른 허용 식재료의 범위로 위로부터 서구(잡식)식단, 지중해식단, 부분채식식단, 채식식단이다. - 네이처 제공
☑ 이대로 가면 2050년 온실가스배출 80% 늘어
고지방 저탄수화물 식단이 보편화된다면 이는 대대적인 농업재편을 의미한다.
즉 곡물을 재배하는 땅이 목초지로 바뀌고 해안가는 양식장으로 뒤덮일 것이다.
올리브기름 같은 식물성도 있지만 지방은 주로 육류와 생선에서 섭취하기 때문이다.
이런 재편이 환경에 재앙이 될 거라는 건 농업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지 ‘사이언스’ 9월 16일자에는
인류가 ‘지속가능하면서도 건강한 식단’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기고문이 실렸다.
지구촌의 식단이 오늘날 서구권의 식단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바뀔 경우(현재 우리나라는 3분의 2쯤 왔을까?)
세계 인구가 100억 명이 되는 2050년에는 대사질환 만연으로 보건비용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식품기후연구네트워크 타라 가넷 박사는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한 건강 식단을 내놓더라도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면 권장 식단이 될 수 없는 시대라고 주장한다.
즉 오늘날 건강과 환경 모두에 안 좋은 서구식 식단(lose-lose diet)을
어떻게 건강과 환경에 다 좋은 식단(win-win diet)로 바꿀 수 있느냐가 인류가 직면한 과제라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극단적인 고지방 저탄수화물 식단은 잘 해야 ‘win-lose diet’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식단이 ‘win-win diet’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인류는 이를 실현할 수 있을까.
2014년 학술지 ‘네이처’(11월 27일자)에는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미국 미네소타대 생태·진화∙행동과 데이비드 틸먼 교수팀은
인구수 상위 100위 이내의 나라들의 50년에 걸친 식단 변화 데이터와 식단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8건의 대규모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건강식단의 가능성을 검토했다.
이에 따르면 현재 지구촌이 지향하고 있는 서구(잡식)식단의 문제는
펄머터 박사가 주장하는 ‘고탄수화물 저지방’이 아니라 ‘정제된 당류, 정제된 지방과 기름, 육류’의 과잉에 있다.
즉 대부분의 나라에서 지난 50년에 걸쳐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이런 방향으로 식단의 변화가 일어났거나 일어나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말이다.
실제 중국의 사례를 보면
1980년만 해도 당뇨병인 사람이 인구의 1% 미만이었지만 불과 한 세대가 지난 2008년에는 10%에 이르고 있다.
1961년과 2009년을 비교하면 하루 섭취열량이 1000칼로리 이상 늘었고 육류소비량도 열 배가 됐다.
대사질환의 주범은 탄수화물이 아니라 과잉의 칼로리임을 잘 보여주는 데이터다.
아무튼 오늘날 서구식단을 지향하는 경향은 지구촌 공통의 현상으로 소득증가에 따라 식단이 수렴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갈 경우 2050년 식단으로 인한 1인당 온실가스배출량은 2009년에 비해 32%가 늘게 된다(평균 소득이 올라가므로).
2050년 인구는 2009년에 비해 36%가 늘 것으로 예상되므로 둘을 곱하면
인류의 식생활로 인한 온실가스배출량은 이산화탄소로 환산했을 때 23억 톤에서 41억톤으로 80%나 늘어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식단의 서구화가 진행될 때 온실가스배출량이 늘게 되는 주요인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식재료에 따라 같은 칼로리를 낼 때 나오는 온실가스배출량을 산출했다.
그 결과 예상대로 동물성 식재료가 주범이었다. 특히 되새김질 가축(소와 양)과 저인망어업, 재순환여과양식(물을 연속적으로 정화해 물고기를 키우는 방식)에서 온실가스배출량이 많았다.
반면 곡류가 가장 낮았고 동물성 식재료에서는 유제품과 달걀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결국 현재 서구식단에서 동물성 식재료를 줄여야 지속가능한 식단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서구식단을 이런 방향으로 바꾸면서도 건강에 더 좋은 식단이 나올 수 있을까.
연구자들은 서구(잡식)식단과 다양한 식단의 건강효과를 비교한 논문을 분석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즉 올리브유 같은 식물기름은 풍부하면서 육류는 적은 지중해식단과 생선까지는 먹는 부분채식식단,
달걀과 유제품까지는 먹는 채식식단을 서구식단과 비교할 경우 당뇨병은 16~41%,
암은 7~13%, 관상동맥심장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은 20~26% 낮아졌고 전체적인 사망률도 0~18%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이들 식단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식단에서 육류가 차지하는 비율이 줄거나(지중해식단) 제로가 되므로(부분채식과 채식)
예상대로 한 사람이 식사로 1년 동안 배출한 온실가스의 양이 줄어드는 걸로 나왔다.
특히 채식식단의 감소폭이 커 채식식단이 2050년 인류의 표준이 된다면(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먹을거리와 관련된 온실가스배출량은 2009년보다도 줄어든다(인구가 36%나 늘었음에도).
지중해식단과 부분채식, 채식의 평균이 2050년의 표준식단이 되더라도 지금의 배출량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또 5억4000만 헥타르에 이르는 경작지를 자연으로 돌려줄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됐다(육류소비가 크게 줄므로).
얼핏 생각하면 인류가 지속가능하면서도 건강에도 좋은 식단으로 바꾸는 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지만(필자처럼 이미 부분채식에 가까운 식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막상 주변을 보면 ‘정제된 당류, 정제된 지방과 기름, 육류’의 과잉에 절어있는 습관을 고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출처 : 동아사이언스 2016.09.26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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