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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건강

달리기와 존재하기 - 시작하기

by freewind 삶과사랑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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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와 존재하기

시작하기

 

 

...

 

분명 제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책에서 말하듯이 쉽지만은 않다.

게다가 얻지 못한 것을 얻겠다고 나선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삶도 아니다.

우리는 마크 트웨인이 담배를 끊은 횟수만큼이나, 또 성공을 거둔 횟수만큼이나

자주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마트 트웨인은 담배를 수천 번도 넘게 끊었고 그때마다 성공했다.)

 

내일이란 내 남은 삶의 첫날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까지의 혼란스러운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 물음에 대한 정답은 그렇다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훌륭하신 분들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일까?

 

나는 그게 자신의 걸음걸이를 알아가는 일에서 시작했다고 본다.

(물론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삶에서 처음 온전한 인간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아닌,

하나로 어우러진 육체와 정신과 영혼으로 자신의 모습이 채워졌던,

모든 환경과 자유롭게 맺어지는 하나인 상태로 돌아가야만 한다.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하나였던 자신의 자아도, 세계를 대하는 온전한 태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소유한 것들로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의 명령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잦아졌다.

동시에, 또는 순차적으로 우리의 몸 상태도 퇴락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당연히 잘 닦인 길을 택했다.

 

그 순간, 수풀이 우거지고 걸어간 흔적도 보이지 않는 길을 택한 사람이 바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다.

소로가 지성인인지는 모르겠으나,

호기심 많은 관찰자이며 관습적인 가치관을 반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가 대단한 운동가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다.

소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위대한 산책가였다.

덕분에 소로는 언제나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로는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만족감이 내 몸 안에 깃든다.

피곤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다라고 썼다.

수많은 일을 해낸 소로의 적극적인 태도가

몸에서 솟구치는 생명력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소로의 자아는 최상으로 유지되던 몸에 기댈 수 있었다.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살지 못한다면 누구도 완벽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만약 소로가 옳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을 거쳐야만 한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리기 전의 우리 몸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모습이 제대로 갖춰지면 제3의 귀로 이전에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힘을 4차원적으로 육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제대로 모습을 갖출 때, 자아는 지극히 예민하고 직관적이며 민감하기 때문에 더 이상 몸이 망가지지 않는다.

 

건강을 잘 지켜온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은 대단히 충격적이다.

건강 프로그램은 대개 심장마비를 피해 오래 살게 하고 몸의 상태를 늘 긴장시키거나

체형을 보기 좋게 하려는 욕망에서 비롯한다.

그렇게 해서 몸이 우리 마음과 영적인 에너지를 결정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새로운 몸이 있어야만 그 안에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삶을 불어 넣을 수 있다.

우리가 언제나 꿈꿨으나 젊은 시절, 누리면서 살던 몸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

 

이제 상식적으로 우리가 스물여덟 살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기력과 근력과 지구력 등의 지표로 측정한다면 몸의 상태는 스물여덟 살과 맞먹을 수 있다.

운이 좋아 자신에게 맞는 운동 생활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젊음을 되찾아 그 당시에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는지 다시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된다.

 

삶이 덧없이 지나갔다거나,

더 나쁘게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제 다시 살아도 똑같다는 전문가들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다.

내일이란 남은 날의 첫날이다.

 

소로의 길을 따르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몸 안에서 즐거워하라.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만족감을 느껴 보라.

피곤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을 맛보라.

 

애당초 자신이 지나왔던 그 갈림길로 다시 돌아가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왜 태어났는가?‘와 같은 어마어마한 질문의 해답을 찾고 있다면,

일상에서 매번 부닥치는 어떻게 하면?‘이라는 사소한 질문의 해답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자신의 영혼이 궁금하다는 식의 큰 질문의 해답을 원한다면 몸에 대해 던지는 작은 질문부터 해결하라.

성자나 형이상학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운동가가 되어라.

 

삶의 의미와 우주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던졌던 이들의 삶을 살펴보라.

질문을 던져 놓고 한평생 그 해답만 기다리며 살았던 성자들의 글을 읽어 보라.

공통점은 금욕주의에서 나온다.

이는 엄격한 훈련, 고행, 극기 등을 뜻하는 ’ascesis’라는 그리스어에서 비롯한 단어다.

금욕주의자는 괴짜 은둔자가 아니다.

그는 최상의 상태, 최상의 법칙, 최상의 삶을 찾으려는 사람이다.

금욕주의자는 성자와 찰학자 뿐만 아니다.

역도 선수, 축구 선수, 장거리달리기 선수 모두가 금욕주의자다.

 

먼저 자신을 이겨야만 하는데, 이는 단련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는 진실을 직시하는 일을 감당해야만 한다고 키르케고르는 썼다.

그는 걷기를 단련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걸으면서 자신의 철학을 가다듬었다.

칸트 역시 위대한 산책가였다.

이웃들을 마을을 지나가는 칸트롤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

 

 

소로는 산책한 시간만큼 글을 썼다.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몸과 마음은 유기적으로 하나라고, 건강을 찬양한 사람 중 하나인 헉슬리는 말했다.

운동과 명상은 분명히 하나다.

니체는 이렇게 썼다.

가능한 한 앉아서 지내지 마라.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면서 얻은 게 아니라면 어떤 사상도 믿지 마라.

그 사상의 향연에 몸이 참가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자신도 몸을 참석시키고 싶다면, 또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고 싶다면,

음식과 기후와 훈련 등 세세한 부분에도 신경 써야만 한다.

 

...

그러나 훈련은 수많은 식이요법과 기후의 결함을 보충하고도 남는다.

기후에 잘 적응하는 운동선수는 어떠한 환경에도 쉽게 적응해 고도, 기온, 습도 등을 이용해 자신의 능력을 키운다.

이 시점부터 예부터 전해온 몸에 관한 지혜들이 적용되기 시작해 필요와 본성에 따라 먹는 음식도 달라지게 된다.

 

그 다음에는 음식과 기후와 운동하는 방식의 사소한 영역까지 주의를 기울여라.

결국 내가 완벽해지지 못하는 건 나 때문이다.”라고 키르케고르는 말했다.

운동선수라면 그 사실을 잘 안다.

운동선수나 노는 아이는 한 가지 생각만 한다.

자신 안에서 모든 게 가능하고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

 

오늘날 일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은 그저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일 뿐이다.

하루 먹을 빵을 구했다면, 나머지 시간은 노는 게 좋다.

살아남기 위해 의무를 다했다면,

이제 삶에서 더 중요한 무엇인가에 눈길을 돌려야만 한다.

은행 잔고에 신경 쓰면서 살았다면, 이제는 몸과 마음에 신경을 써라.

 

...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에릭슨이 말한 바,

어떤 경우에도 대체 불가능한 그 자체를 자신의 유일한 삶으로 받아들인다는 맥락에서 노년까지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충실하게 산다는 뜻이다.

오르테가의 말처럼, 원래 형성된 특성에 맞는 자신이 된다는 뜻이다.

관점에 따라 건강하게 살기는 일상적인 것일 수도 있고, 힘든 성취일 수도 있다.

중년이 되어서야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분주한 내게는,

그것이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기적이 내게도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운동을 통해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운동은 완벽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활동이다.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아는 데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운동선수는 그 사실을 감추지 못한다.

운동선수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얼마만큼 성장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된다.

이 거짓의 시대에, 위를 향한 좌절된 욕망만이 판치는 시대에

운동선수는 뛰어나고 우아하고 고결한 인간의 실례로 남는다.

적어도 정직한 운동선수들은 충분한 자격이 있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진정한 운동선수는 변명하지 않는다.

진정한 운동선수는 자만심이나 선입견 없이 자신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안다.

그는 순위와 상관없이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낸다.

진정한 운동선수는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능력과 약점을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올더스 헉슬리는 이렇게 썼다.

기본적인 골격과 기질을 바꾸는 일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다.

모든 사람이 꿈꾸는 최고의 상태는 원래 타고난 몸과 마음의 짜임새를 가장 잘 유지한 상태이다.”

 

 

운동선수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끌어낸다.

부정적인 한계보다는 긍정적인 목표를 통해 건강을 추구한다.

운동선수는 금연부터 하고 훈련을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훈련을 시작한 뒤,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운동선수는 훈련보다 먼저 음식을 조절하는 법이 없다.

일단 훈련을 시작하고 나면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음식을 먹게 된다.

그런 식으로 다른 모든 것들도 올바른 자리를 잡아간다.

수면 습관도 자리 잡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배가 부를 때는 휴식을 취하고 위장이 비워지면 연습에 나선다.

알아서 준비운동을 하고 작은 진전에도 만족한다.

 

 

운동선수는, 절정의 순간과 끔찍한 순간 사이의 미세한 연결지점을 발견한다.

그는 몸에서 울리는 신호에 귀를 기울인다.

심장 뛰는 소리, 따끔거리는 목, 현기증, 사소한 관절 통증, 한밤중에 잠에서 깨는 일 등.

이 모든 증후에는 의미가 담겼기 때문에 운동선수는, 숲에 사슴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부러진 나뭇가지를 살피듯,

섬세하게 이런 증후를 살핀다.

몸의 신호를 통해 그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갔다는 걸 알게 된다.

 

몸 관리가 끝나면 자기발견을 시작한다.

자신이 하는 운동 분야의 기술을 오나전히 장악한 운동선수는 그 분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통해,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발견한다.

자신의 진짜 성격을 발견한다.

 

 

...

생리학자들은 가장 혹독한 육체적 시련을 거친 사람만이 가만히 앉아 있는 삶을 즐겨도 괜찮다고 말한다.

인간은 본래 가만히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비활동성은 인간의 몸에 대단히 부자연스럽다.

평형감이 깨지게 된다.

활동해야만 심장과 순환계와 몸의 모든 체계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게 없다면 모든 게 뒤틀리기 시작한다.

 

...

 

몸이 없이 마음이 남아있겠는가?

동맥만큼이나 빨리 지능이 마비된다.

창의력은 행동에서 우러난다.

앉아서 떠오르는 생각일랑 믿지 말라.

 

자리에 앉아 방관하는 사람은 사색가가 아니다.

그는 책상물림이다.

언제나 진실을 향해 자신을 열어두고 직접 경험해 보기 위해 늘 찾아다니는 운동선수와 달리,

방관자는 팔짱만 끼고 앉아 있다.

그런 사람은 완고한 생각만 할 뿐이다.

그런 사람은 배타적이고 외골수적인 선입견으로 똘똘 뭉쳐 있다.

 

방관하는 책상물림은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해 더 이상 직접 경험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감정들을, 어떻게 하든 성에 차지 않는 감정들을 다루려면

책상물림들은 반드시 직접 경험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그동안 너무나 멀리했던 운동선수들의 방식을 익혀야 한다.

운동선수들은 노력을 통해 모든 감정을 풀어 놓고 카타르시스를 얻기 때문이다.

 

책상물림은, 자신도 원하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몸을 움직이는 자들은 늘 즐거워한다.

거기에는 놀이하는 재미, 승리하는 재미, 심지어는 패배하는 재미까지 있다.

몸으로 부딪치며 그들은 소진을 경험한다.

이 소진을 통해 형제애와 평등을 얻게 된다.

이 소진을 통해 멋진 승자뿐만 아니라 멋진 패자까지도 될 수 있다.

 

바활동적인 책상물림이 운동선수의 경험에 대해 알 도리가 없으니,

스포츠의 팬이라는 사람들은 패자가 왜 멋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므로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보다 구경꾼들이 승리에 더 집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응원하는 팀이 패하면 그 감정들을 건강하게 배출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팬들은 이웃에,

가까운 물체에, 심판에, 경기장에, 게임 그 자체에 쏟아붓기 쉽다.

 

응원하는 팀이 연패에 빠진 극렬 팬이 진정하기를 기대하느니,

어느 날 갑자기 술고래가 술을 끊고, 약물 중독자가 마약을 끊고,

하루에 세 갑씩 피워대던 골초가 갑자기 금연을 선언하기를 기대하는 게 낫다.

 

이런 구경꾼이 그 모든 육체적, 심리적, 감정적 시험을 거쳤더라도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찾으려면 큰 산을 하나 더 넘어야 한다.

구경꾼이란 군중의 일부라는 말이다.

그는 영화 게임 The Games에서 코치가 말한 적이 있는,

배에 기름이 잔뜩 낀 채로 스탠드에 모인 얼간이들중의 하나다.

군중 속에 들어가게 되면 누구나 자신이 세운 행동 기준과 윤리 감각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

군중 속의 인간은 다른 구경꾼과 보조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진화의 사다리에서 두 계단은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구경꾼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은 아래도 떨어진다.

환호와 고함 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그 삶이 먼저 끝난다.

 

 

- 조지 쉬언, 달리기와 존재하기, 시작하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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