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단풍나무
제인 허쉬필드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싶다
사흘 동안 아낌없이 불타고 불타는
그리고 이틀을 더 불타다가
모든 잎을 떨어뜨리는
이 단풍나무처럼
검푸른 깊이 속으로
무엇이 오든 받아들이고 다시 돌려주는
이 호수처럼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
고요한 마음속에서
세상은 다시 태어난다
두 개의 지구가 돌고
두 개의 하늘이 있고
두 마리의 왜가리가 하강하며
하나가 된다
물고기조차
한순간 둘이 되었다가
사라진다
그 물고기이고 싶다
비가 오면 모든 것을 잃었다가
되돌아오는 그 투명함이고 싶다
가장자리에 핀 꽃 때문에
얕은 모래들에 속아
걸어 들어가는 모든 것은 빠져야만 하는
늪이고 싶다
그 빠져듦이고 싶다
날이 어둑해졌을 때만
은밀하게 목을 축이러 오는 자이고 싶다
그리고 삼켜지는 자이고 싶다
눈 없이 보고
귀 없이 듣고
자신의 의지나 두려움 없이
가장 부드러운 손길에도 떨리는
물이고 싶다
차가운 달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이 흘러가게 두는
판단하지도 말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흘러가게 두는
그런 물이고 싶다
랄 데드는 노래했다
하나의 호수가 있다고
겨자씨 하나보다도 작지만
모든 것이 되돌아오는
아, 마음이여
나에게 그 호수를 주지 않을 거라면
아니, 줄 수 없다면
그 노래를 달라
- 제인 허쉬필드 <호수와 단풍나무> (류시화 옮김)
☑ 해설 : 류시화
때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인 곁에 서서 그가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가을 저물녘, 시인은 호숫가에 서 있다.
호수 둘레에는 단풍나무들이 불타고 있다.
초록색이던 단풍나무는 갑자기 붉게 타오르듯 단풍이 든다.
멀리서 보면 마치 불이 붙은 것 같다.
사흘 동안 그렇게 불타고 이틀을 더 불타다가 갑자기 불꽃들을 전부 바닥에 떨군다.
내면의 모든 구석까지 남김없이 불태우는 열정적인 삶과 그것을 내려놓는 평온함,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고 시인은 호수를 응시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는 어떤 풍경이든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수면에 비쳐 준다.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 고요한 호수는 판단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고요한 마음과 같다.
그때 세상은 투명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이 시의 핵심이다.
마음의 호수가 고요해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고 비출 때 인간은 거듭남을 경험한다.
'나'라는 관념이, 에고가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요한 호수에는 모든 것이 두 개이다.
하늘이 있고, 호수에 비친 하늘이 있다.
호수를 향해 날아 내려오는 왜가리가 있고, 호수 속에도 왜가리가 있다.
그 두 마리 왜가리가 마침내 수면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왜가리에게 잡혀 들어올려지는 물고기도 수면에 비쳐 한순간 두 마리가 되었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비가 오면 호수는 그 전부를 잃는다.
호수는 흙탕물이 되고 호수에 비쳤던 풍경들도 사라진다.
마음에 풍랑이 일면 세상은 더 이상 그곳에 있는 그대로 비치지 않는다.
그때는 그렇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비가 와서 모든 것을 잃는 것, 감정이 뒤섞이는 것, 그것 또한 삶의 일부이니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날이 개이고 계절이 바뀌면 호수는 다시 투명함을 되찾는다.
모든 것은 순환하기 때문이다.
단풍나무는 호수의 물을 마시고, 호수는 단풍나무가 된다.
물고기는 왜가리에 잡아먹히고 달빛이 그것들 모두를 무중력 상태로 만든다.
비는 왔다가 간다.
왜가리의 부리가 수면을 건드리는 순간, 물은 떨림으로 답한다.
거기 영원함과 부서짐이 있고, 사라짐과 돌아옴이 있다.
투명하게 비추는 것이 있고 갈망하는 것이 있다.
가장 부드러운 손길에도 수면이 떨리는 물,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예민함이고 깨어 있음이다.
달빛은 호수의 수면을 통과하듯이 내 마음을 통과한다.
그렇듯 세상일에 대해 판단이나 비판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고요한 연못을 보며 배우는 것이 그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읽어 내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모두에게 한 가지 의미로 읽히는 시, 1차원적으로 읽혀지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시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시인의 탓만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적 상상력을 우리가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으로 바라볼 때 세상의 신비가 더 깊다.
호수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시인은 14세기 인도의 신비가 랄 데드의 시를 떠올린다.
'한 알의 겨자씨보다도 작은 호수가 있다
그러나 그 호수에서 모든 존재가 물을 마시며
사슴, 자칼, 코뿔소, 바다코끼리가 빠진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네 안으로 빠지고 빠진다'
그 호수는 인간의 마음이다.
겨자씨보다도 작은 마음에 온 우주가 담긴다고 랄 데드는 노래한다.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할 거라면, 그 고요하고 투명한 호수로 나를 채우지 못할 거라면,
그 노래로라도 나를 채우고 싶다고 시인은 기도한다.
그 기도는 이 시를 좋아하는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좋은 시는 이렇듯 기도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그러하듯이.
제인 허쉬필드(1953 ~ )는 뉴욕시 출생의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시인으로,
선불교 사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얼마 전 열린 세계 작가 페스티벌에 참석차 한국을 다녀갔다.
painting_Judith Bar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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