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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와신상담(臥薪嘗膽)

by freewind 삶과사랑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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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臥薪嘗膽)

 

 

요약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싸움에서 전해지는 고사이며

가시가 많은 나무에 누워 자고 쓰디쓴 곰쓸개를 핥으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는 뜻이다.

 

섶나무 위에서 잠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고난도 감수하는 정신을 말한다.

 

: 엎드릴 와, 누울 와

: 섶나무 신

: 맛볼 상

: 쓸개 담

 

 

유래

 

춘추 시대 오()나라 임금 합려(闔閭)와 월()나라 임금 구천(勾踐)은 라이벌인 동시에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지금의 절강성에 있던 취리(檇李)라는 곳에서 격돌한 것이 절정이었는데,

합려는 이때 적의 화살에 맞은 손가락 상처가 의외로 크게 악화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임종에 앞서 합려는 아들 부차(夫差)에게 말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네 아비를 죽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왕위에 오른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갈았다.

그는 섶나무를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으며[臥薪(와신)]’, 자기 방에 드나드는 신하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유언을 한 번씩 외치게 함으로써 자기 마음의 고삐를 항상 바짝 죄었다.

그런 한편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해 군대를 정병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사실을 안 월나라 구천은 코웃음을 쳤다.

 

아들놈이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고젖비린내 나는 것이! 그렇다면 내가 먼저 본때를 보여 주리라.”

 

구천이 선제 공격을 서두르자, 참모인 범려(范蠡)가 말렸다.

 

()을 움직이는 데는 많은 준비가 선행되어야 하고그러고 나서도 적당한 시기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 소리 마오. 합려가 이미 죽고 없는데 무슨 준비며 시기라는 거요?”

젊은 오왕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차를 우습게 보는 구천은 주위의 만류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 출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구천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군은 호랑이같이 사나워, 월나라군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오나라군은 적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아넣고는 철통같이 포위해버렸다.

 

내가 너무 경솔하여 이 치욕을 당하는구나!’

 

월왕 구천은 땅을 치고 싶도록 후회가 되었다.

이제는 사지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든가, 앉아서 굶어 죽든가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때 범려가 말했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닙니다오왕에게 항복하고 앞으로 신하로서 섬기겠다고 약속하여

일단 이 국면을 벗어난 다음 훗날을 도모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합려의 자식놈에게 항복을?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소?”

공론이란 한때의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큰일을 도모하는 데 남의 뒷소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하지만 항복을 청한다고 그가 들을까하루에도 몇 번씩 애비의 유언을 되새긴다는 지독한 놈인데.”

오나라 재상 백비(伯嚭)는 물욕이 많은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자기네 임금을 설득하라고 하는 겁니다.

어쨌든 시도해 보지도 않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월왕 구천이 백기를 들자오나라 대신들 중에서도 강경론자인 오자서(伍子胥)는 받아들이지 말 것을 주장했다.

항복을 받고 월왕을 놓아 보내는 것은 위험합니다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쳐서 그의 명맥을 끊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자, 월나라로부터 뇌물을 받은 백비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월나라군은 사생결단으로 덤빌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앞에 당할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끝내 이기더라도 우리 병사들 역시 부지기수로 죽거나 다칠 것인즉실로 그 뒷일이 걱정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침을 삼키며 이 싸움의 향방을 지켜보고 있을 사방의 군웅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오왕 부차는 결국 백비의 간언에 따랐다.

항복한 구천으로부터 신하로서 섬기겠다는 약속을 받아들이고 귀국을 허락하는 선처를 베풀었다.

이제는 오나라 속령(屬領)이 된 고국에 돌아온 구천은

곁에 항상 짐승 쓸개를 놓아 두고 그 쓴맛을 핥으며[嘗膽(상담)]’ 복수의 칼을 갈았다.

구천이 은밀히 군사력 증강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오자서는 임금에게 간청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구천은 목숨을 살려 준 전하의 너그러운 은의도 잊고

군사를 기르기에 여념이 없다 합니다. 시급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오. 군사력이란 그렇게 단시일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오그쪽보다 신경 쓸 곳은 따로 있소.”

 

당시 부차의 관심은 중원 쪽으로 쏠려 있었고

()나라 중원 진출, 나아가서 천하 패권 쟁탈의 제일차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자서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간언하자마침내 화가 치민 부차는 그더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이때 오자서는 죽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눈을 빼서 동문(東門) 위에 놓아다오내 눈으로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망하는 꼴을 확인해야겠다.”

 

회계의 치욕적 항복이 있었던 날로부터 12년이 지난 기원전 482년 봄,

구천은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번개같이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부차는 황지(黃池)란 곳에서 여러 제후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패자(覇者)가 되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국내의 오나라군이 월나라군에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로부터 장장 7년 동안 오나라와 월나라는 전쟁을 계속했는데,

그 결과 초전의 승기를 끝까지 살린 월나라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부차는 월나라군이 서울인 고소(姑蘇)로 육박하자 하는 수 없이 나아가 무릎을 꿇었고,

이로써 오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내 그대를 죽일 것이로되, 회계에서 진 빚이 있어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다.

그 대신 용동(甬東)으로 가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구천은 이렇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부차는 그 호의를 사양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부차가 꿈꾸었던 천하 패자의 자리는 구천의 차지가 되었다.

 

 

보충

 

()의 전투에서 대패한 진()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초나라가 점차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진나라와 초나라 간의 패권을 다투는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결국 송나라가 나서서 두 나라를 화해시키고 나서야 전쟁을 그만두었다.

이리하여 중원의 정세가 평온해지자 남방에서 오나라와 월나라가 싸우기 시작했다.

오나라 왕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의 보필로 구거(桕擧)의 싸움에서 초나라를 대패시켰는데

오나라군이 초나라 도성 정도를 진격할 때 월나라군이 오나라로 진격했다.

이로 인해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합려는 즉시 군대를 돌려 오나라로 돌아와 월나라군에게 반격을 가했다.

 

기원전 496, 월나라 왕 윤상(允常)이 병으로 죽자 아들 구천(勾踐)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합려는 월나라가 국상을 치르는 틈을 타서 군대를 진격시켰다.

두 나라 군대는 휴리(携李)라는 곳에서 크게 싸웠는데 결국 오나라군이 대패하고 합려는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합려는 임종 시에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의 원수를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왕이 된 부차는 기필코 월나라를 패망시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오자서를 상국(相國)으로, 백비(伯嚭)를 태재(太宰)로 삼아 월나라를 진격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복수를 하기 위해 부차가 밤낮으로 군사를 조련한다는 소식을 들은 구천은 이듬해에 선제 공격을 했다.

대초(大椒)라는 곳에서 결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월나라군이 대패했다.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친 구천은 오나라 군사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었다.

 

 

월왕 구천의 검 [춘추시대]

 

고대 병기 중에서도 특이한 보물로, 출토 당시에도 여전히 빛이 났다굉장히 날카로워서 머리카락도 벨 수 있다.

몸체에는 흑색의 무늬가 있고 월왕 구천 자작용 검(越王勾踐自作用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검은 고대 중국의 검 주조 기술이 높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구천은 부인을 죽이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고 했다.

그런데 대신 문종(文種)과 범려(範蠡)가 맹목적인 결전은 오로지 죽음뿐이라면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오나라 백비에게 뇌물을 먹여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 어떠냐고 설득했다.

구천은 그 말을 따라 몰래 백비에게 미녀들과 금은보화를 보냈다.

탐욕스러운 백비는 뇌물을 받자 매우 기뻐했으며, 부차에게 월나라 구천을 살려주라고 권유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천을 살려주기로 했다.

, 구천이 오나라로 와서 속죄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범려

 

 

구천은 부차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나라 대사를 문종에게 맡긴 후 부인과 대부 범려 등을 데리고 오나라로 갔다.

부차는 아버지 합려의 능묘 옆에 돌집을 하나 짓고 구천 부부와 그의 대신들을 몰아넣었다.

그러고는 죄수옷을 입히고 말을 먹이는 고역을 시켰다.

그리고 외출을 할 때면 범려를 밟고 수레를 탔으며, 구천에게는 말고삐를 잡게 했다.

구천은 이렇게 2년 동안 오나라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다.

문종은 백비에게 미녀와 금은보화를 또 보내어,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내도록 부차에게 진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백비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법이 거의 없는 부차였다.

2년 동안 구천이 진심으로 속죄했다고 생각한 부차는 백비의 말을 듣고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이 원수를 기필코 갚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무명옷을 입고 잡곡을 먹었다.

잠도 초가집에서 잤으며 돗자리 대신 섶나무를 펴고 잤다.

식탁 위에는 쓰디쓴 쓸개를 달아놓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쓸개를 맛보고는

구천아, 회계의 치욕을 잊었단 말이냐?” 하고 외치곤 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고 분투하도록 거듭 자신을 격려했던 것이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긴 유래이다.

 

월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본 오자서는 근심이 커졌다.

그는 구천이 지금 쓸개를 맛보며 국민들과 함께 복수를 벼르고 있습니다.” 하고 부차에게 여러 번 간언을 했다.

그러나 부차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오자서를 멀리했다.

2년 후에 부차는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온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경하했지만 오자서는 도리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제나라를 친 것은 작은 승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큰 심복지환을 남겨놓는 것인 줄을 왜 모르십니까?”

 

이 말에 대노한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살하라며 보검 한 자루를 주었다.

오자서는 그 보검으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얼마 후, 구천은 문종에게 조정 일을 보게 하고 자신은 범려와 함께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오나라를 습격했다.

오나라군은 크게 패하고 오나라의 태자도 전사했다.

기원전 473, 구천은 재차 오나라를 진격해 부차를 고소산(姑蘇山)에서 포위했다.

이렇게 해서 월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구천은 부차에게 회계 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섬인 용동(甬東)을 봉해주었다.

부차는 간신 백비의 말만 듣고 충신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다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을 베어 자살하고 말았다.

구천은 국왕의 예로 부차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백비는 죽여버렸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은 춘추시대 말기에 일어난 큰 사건이었다.

기원전 475년에 이르러 중국은 전국시대에 진입했으며, 봉건사회가 시작되었다.

 

 

 

 

* 출처 : naver 검색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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