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향기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시미학산책』『비슷한 것은 가짜다』『그림 속의 새 한시 속의 새』등 그의 책은
한문학에 생명을 불어넣는 듯하다.
고전 소품을 지금 말로 옮기는 작업을 꾸준히, 혹은 과격하게 실천하고 있다.
문화와 나
물가에 작은 집을 짓고, 울타리는 잇지도 않았다.
복숭아, 살구, 배, 밤나무를 집 둘레에 심었다.
오이 심고 논을 갈며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렸다. 농사철이면 언제나 밭 사이에 있어,
가래 멘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했다. …
차라리 혼자 외로이 살며 세상에 구차하게 부합하지 않을지언정,
위선군자(僞善君子)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마음으로 굽히지 않으리라.
-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년)
선비란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비슷하게 양반이란 말도 있지만 이것은 상놈과 대비되는 신분상의 명칭에 가깝다.
선비는 문화적 의미를 띠는 일종의 정신 가치다. 선비 정신이란 말은 있어도 양반 정신이란 말은 없다.
선비 앞에 붙음직한 꾸밈말은 ‘대쪽같은’, ‘꼿꼿한’, ‘올곧은’, ‘꼬장꼬장한’, ‘지조 있는’ 등의 표현이다.
‘부드러운’이나 ‘섬세한’ 같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선비란 말 속에는 현재 우리에게 없는 결핍을 메우려는 기대가 깃들어 있다.
불의와 손잡지 않는다. 앎과 삶이 따로 놀지 않는다. 나날이 향상하는 삶을 추구한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선비에 대하여(原士)〉란 글에서 선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비는 아래로 농부나 공인(工人)과 나란하고,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한다.
지위로는 차이가 없고, 덕으로는 바름을 추구한다.
한 선비가 독서하면 혜택이 온 세상에 미치고, 보람이 만세에 드리워진다.
그래서 천하의 공변된 말을 사론(士論)이라 하고, 당대의 으뜸가는 부류를 사류(士流)라 하며,
사해(四海)의 의로운 소리를 고취시키는 것을 사기(士氣)라 한다.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논하는 것을 사림(士林)이라 한다.
선비는 본시 정해진 자리가 없다.
선비는 아래로 농투성이 농부에서 위로 왕공 귀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 있든지 그 마음가짐은 한결 같다.
예전의 교육이란 한 마디로 바른 선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사랑을 남에게 미루어 확산하는 어짊, 옳지 않은 일에는 분연히 일어서는 용기,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가르는 판단력,
들 때 들고 날 때 날 줄 아는 올바른 몸가짐. 이것을 익혀 실천하는 전인적 인격을 선비 또는 군자라 불렀다.
이것이 가치 지향을 지닐 때 선비 정신이 된다.
사기(士氣)가 진작되고 사론(士論)이 바로 서야 나라가 제 자리를 얻었다.
사화(士禍)가 일어나 사림(士林)이 무너지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선비는 한자로는 ‘사(士)’에 해당한다.
그간 우리는 선비를 주자의 성리학을 따르고 실천한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존재로만 보아온 경향이 없지 않다.
출처궁달(出處窮達)의 갈림
사람은 사회적 존재다.
선비의 삶 또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사회적 실천을 꿈꾼다. 하지만 바깥보다 안이 먼저였다.
내 몸을 먼저 닦아야 거기서 생긴 힘으로 남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기안인(修己安人)의 공부가 강조되는 까닭이다.
몸을 닦으려면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무자기(毋自欺) 공부, 마음을 다스리는 구방심(求放心) 공부를 우선해야 했다.
수기(修己)가 갖추어졌다 해도 안인(安人)의 기회는 좀체 오지 않는다.
마음 속에 쌓인 경륜을 펼치고 싶지만 도처에 장벽과 만난다.
여기서 나고 드는 출처(出處)와 뜻을 잃고 얻는 궁달(窮達)의 갈림이 생긴다.
세상에 나가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의 처신이 어렵긴 해도,
낙담과 곤궁 속에서 본래 품었던 바른 뜻을 지켜 가기는 더 어렵다.
공자는 “궁해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현달해도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窮不失義, 達不離道)”것을
선비의 바른 마음가짐이라 했다.
맹자는 이 말에 “궁하면 홀로 그 몸을 바르게 하고,
달하면 천하를 아울러 바르게 한다.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고 화답했다.
출(出)하면 치군택민(致君澤民)
처(處)하면 조월경운(釣月耕雲)
명철군자(明哲君子)는 이럴사 즐기나니
하물며 부귀(富貴) 위기(危機)라
빈천거(貧賤居)를 하오리다.
권호문(權好文, 1532-1587)①의 시조다.
①조선 중기의 학자 송암(宋巖)권호문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부모를 연이어 여의고 상을 지내면서 벼슬길을 단념하고,
청성산 기슭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유유히 살았다.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시가에 관심이 많아『독락팔곡(獨樂八曲)』과『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을 지었으며, 문집『송암집』이 있다.
안동 송암 서원에 제향되었다.
기회를 얻어 세상에 나가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내 한 몸 헌신한다.
알아주는 이 없어 묻혀 지내면 공연히 주색잡기로 인생을 탕진하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대신,
달과 구름을 벗삼아 자연 속의 삶을 즐거워한다.
부귀는 위험을 불러오는 기틀일 뿐이니 빈천(貧賤)의 삶을 기쁘게 살겠노라 했다.
이것이 선비가 가는 길이다.
선비의 길은 대부분 득의의 길이 아니다. 가시밭길이다.
정의는 늘 불의 앞에 무력하다.
아첨하고 남 헐뜯는 말은 듣기에 달콤하고, 곧고 바른 말은 귀에 늘 거슬린다.
윤선도(尹善道, 1597-1671)②는 또 이렇게 노래한다.
②조선 3대 시가인 가운데 한 사람인 고산 윤선도는 해남에서 자랐다.
남인의 거두로서 복직과 파직을 반복하며 일생을 거의 유배지와 보길도 등에서 보냈다.
정원을 경영하고 시가를 지으며 풍류 문화의 한 획을 일구었다.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복서·음양·지리에도 통했다. 저서에『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외다 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밖의 여나믄 일이야 분별할 줄 있으랴.
이것이 맹자가 말한 ‘독선기신(獨善其身)’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다.
옳다고 칭찬해도 들뜨지 않고, 그르다고 비방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떳떳하기만 바랄 뿐, 다른 분별은 없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③ 는 송나라 두준지(杜濬之)의 시를 자신이 엮은 『송유민보전(宋遺民補傳)』에 실었다.
③ 아정(雅亭) 이덕무는 서얼 출신으로 가난하게 자랐으나 재주가 뛰어나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박지원 등과 사귀고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시집『건연집(巾衍集)』을 내어,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렸다.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많은 시편을 남겼고, 문자학, 박물학, 풍토, 금석, 서화에 두루 통달하여 박학했다.
『청비록』『아정유고』등 생전에 남긴 여러 저서는 후일『청장관전서』로 편찬되었다. 그 시는 이렇다.
차라리 백리 걸음 돌아 간데도 寧枉百里步
굽은 나무 아래선 쉴 수가 없고, 曲木不可息
비록 사흘을 굶을지언정 寧忍三日飢
기우숙한 쑥은 먹을 수 없네. 邪蒿不可食
배고파도 바르지 않은 쑥은 먹지 않고, 힘들어도 굽은 나무 아래서는 쉬지 않는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옳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어려움에 처해도 정면 돌파할 뿐 구차하게 모면하려 들지 않는다.
명예를 잃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치욕적인 까닭이다.
또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은 『야설(野雪)』에서
눈길 뚫고 들길 가도 穿雪野中去
어지러이 가지 않네. 不須胡亂行
오늘 아침 내 발자국 今朝我行跡
뒷사람의 길 될 테니. 遂爲後人程
라고 노래했다.
지금 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이 된다. 어찌 발걸음을 흐트릴 수 있겠는가?
눈길을 걸어가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역경 속에 빛나는 정신
막상 현실의 역경과 좌절 앞에 초연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현실의 득의만 따진 나머지, 출세를 위해 아등바등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역경의 시간에 다섯 말의 곡식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은거했던 도연명(陶淵明)의 歸去來를 꿈꾸며 전원의 삶을 그리워했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 한 도연명의 시는 그네들이 꿈이었다.
좌절의 순간에는, 옷 벗고 자려다 말고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 때문에 깊은 밤
벗과 승천사(承天寺)로 찾아가 뜰 가운데 강물처럼 고인 달빛과 물풀처럼 어린 대나무 잣나무 그림자에 취했던
소동파(蘇東坡)를 동경하며 예술의 정취로 마음을 어루만졌다.
봄날 갑자기 고향에서 나는 농어회와 순채 나물이 못 견디게 먹고 싶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 장한(張翰),
서호에 살며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삶 자체가 예술이 된 임포(林逋)④를 선망했다.
④ 중국 북송의 시인 임포는 절강성 출신으로 부귀를 추구하지 않고 서호의 고산에 은거했다.
매화와 학을 처로 삼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풍화설월( )을 평담하게 읊은 시를 많이 남겼는데,
그 담백한 시풍은 송시의 선구가 되었다.
어머니와 누이가 영양실조에 폐병으로 죽는 와중에,
얼음이 꽁꽁 어는 방안에서 『논어』를 읽으면서 미쳐 날뛸 것 같은 마음을 다잡던 이덕무.
강진 귀양 시절, 아내가 결혼식 때 입었던 빛 다 바랜 낡은 치마를 부쳐오자,
그것으로 공책을 만들어 자녀들을 위한 훈계를 빼곡이 써주었던 다산 정약용.
조선이 오백 년 간 선비를 키워 왔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 따라죽는 선비 하나가 없다면
이 아니 부끄러우냐고 아편덩이를 삼켜 순절했던 매천 황현(黃玹, 1855~1910년)⑤.
⑤조선 왕조 최후의 선비라고 해야 할 매천 황현은
광양 출신으로 시문에 능하여 1885년 생원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며 은거했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통분하며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음독하여 순국했다.
한말 역사를 담은『매천야록』은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이런 맵고 따뜻한 마음들이 지난 역사의 버팀목이 되어 왔다.
그 바탕에 선비가 있었다.
선비란 말의 값어치
큰 인물이 세상을 뜨면 지금도 ‘이 시대 마지막 선비’란 표현으로 그를 애도한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이 말을 쓰지는 못한다.
권세나 지위로가 아니라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고결했던 삶 앞에만 쓴다.
선비란 말은 지금도 지식인에게 붙는 최대의 찬사다.
아는 것은 많아도 실천할 줄 모르는 지식, 권위는 없고 권위주의만 팽배한 사회.
자기는 안 하면서 남만 부추기는 이기주의, 줏대 없이 풍문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무정견(無定見)과 몰 안목.
이 속에서 선비란 말이 숨 쉴 곳은 없다.
선비 하면 지금 사람들은 으레 고리타분하고 앞뒤 꼭 막힌 꼬장꼬장한 딸깍발이를 떠올린다.
선비란 말이 참으로 값없이 된 세상에 살고 있다.
선비는 없다.
하지만 선비로 표상되는 정신 가치는 너무도 소중하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지식도 정보도 아니다.
세상의 표정을 앞서 읽는 식견, 단절된 세계와의 관계성을 복원하는 통찰력, 스스로의 삶 앞에 떳떳한 긍지다.
선비 정신의 회복을 통해 되찾아야 할 미덕들이다.
- 출처 : Naver 블로그 운명애(tcasuk)
'고전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곡자에서 배우는 21세기 협상술 (0) | 2022.05.25 |
---|---|
독서야말로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깨끗한 일이다 (0) | 2022.05.24 |
千萬買隣(천만매린) (0) | 2022.05.20 |
지피지기백전불태 [知彼知己百戰不殆] (0) | 2022.05.19 |
혀에게 재주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어렵다 (0) | 2022.05.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