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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

내 목소리는

by freewind 삶과사랑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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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는

 

안나 아흐마토바 (러시아의 여성 시인)

 

 

 

내 목소리는 가냘프지만

의지는 약하지 않네.

사랑이 없으니 내 마음 오히려 가벼워졌네.

하늘은 드높고

산바람 불어오니

티 하나 없는 나의 생각들

불면증을 돌보던 간병인도 다른 이에게 가버렸고

나 이제 회색빛 재를 갈망하지 않으니

시계탑 문자판의 휘어진 바늘이

죽음의 화살로 보이지도 않네.

과거는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네.

자유는 눈앞에 와 있으니

나는 모든 것 허락하네.

햇살이 촉촉한 봄의 담쟁이덩굴을 따라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슬픔으로 피워낸 꽃

 

조선일보 Books 2005. 5. 7 천양희·시인

 

 

나는 가끔 말을 거꾸로 읽는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싶을 때 답답함을 푸는 한 방법이다.

가령 정치를 치정으로, 교육을 육교로, 작가를 가작으로, 사설을 설사로,

시집을 집시로, 가출을 출가로, 입산금지를 지금 산에 들어감으로,

자살을 살자로 읽어보는 것이다.

 

읽고 나면 무엇이든 본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방법이 아름다운 봄꽃들 때문에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다.

꽃들은 아무리 무리지어 피어나도 저마다 홀로 아름다운데

나는 사람들 속에서 얼마나 홀로 아름다웠나 하는 반성 때문이다.

내가 회복해야 할 것은 거꾸로 읽는 말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름다움이라고 처음부터 그냥 아름다움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아름다움도 그 나름대로 숱한 상처를 지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이라 말하고 싶다.

상처를 알고 슬픔을 삭인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상처 때문에 많이 아프거나, 슬픔 때문에 끝도 없이 무너질 때

러시아의 여성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내 목소리는을 읽으면서

지금 내 목소리는 어떨까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내 목소리는 가냘프지만/ 의지는 약하지 않네/ 사랑이 없으니 내 마음 오히려 가벼워졌네/ 하늘은 드높고/ 산바람 불어오니/ 티 하나 없는 나의 생각들/ 불면증을 돌보던 간병인도 다른이에게 가버렸고/ 나 이제 회색빛 재를 갈망하지 않으니/ 시계탑 문자판의 휘어진 바늘이/ 죽음의 화살로 보이지도 않네/ 과거는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네/ 자유는 눈 앞에 와 있으니/ 나는 모든 것 허락하네/ 햇살이 촉촉한 봄의 담쟁이 덩굴을 따라/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이란

그녀는 역사의 격랑과 개인의 상처로 파란만장하게 살았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살다간 시인이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시를 쓴 신동이었고 23세 때 첫 시집 저녁을 냈으며

다섯 살 때부터 톨스토이의 철자교과서에 따라 글 읽는 법을 배웠고

프랑스 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세기 초 20년 동안 러시아의 가장 인기 있었던 시인이기도 한 그에게도

16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좋은 시를 만나면

나는 감동에 젖어 모든 슬픔을 잊고 그것을 읽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이 한마디로도

그가 얼마나 시를 사랑했고 운명처럼 생각했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슬픔이라며

슬픔을 시로 꽃피운 그를 생각해 보는 아침.

비로소 나도 슬픔만한 거름이 없다고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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