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집 ‘순간의 꽃’ 중에서
- 제목이 없는 아주 짧은 시들로 구성되어 있는 시집
엄마는 곤히 잠들고
아기 혼자서
밤기차 가는 소리 듣는다.
한쪽 날개가 없어진
파리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도 다 가고 있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보았다.
길 한 복판
개 두 녀석이 붙어있다
나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마당에서 눈 내리고
방안에서 모르네
동현이네 닭이 운다
용식이네 닭이 운다
순남이네 닭이 운다
금철이네 닭이 운다
금철이 할아버지 숨졌다
어쩌란 말이야
복사꽃 잎
빈 집에 하루 내내 날아든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봄바람에
이 골짝
저 골짝
난리 났네.
제정신 못 차리겠네.
아유 꽃년 꽃놈들!
방금 도끼에 쪼개어진 장작
속살에
싸락눈 뿌린다.
서로 낯설다.
저쪽 언덕에서
소가 비 맞고 서 있다
이쪽 처마 밑에서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둘은 한참 뒤 서로 눈길을 피하였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우리 모두 무죄입니다.
시인은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누구도 매순간의 엄연한 기운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변화 미분(微分)들의 순간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들이 사물이나 현상 그리고 나 자신의 심성의 운율에 끊임없이 닿아오면서 어떤 해답을 지향한다.
그럴 때의 직관은 그것이면 더 바랄 나위없는 순진무구이다.
삶에 대한 시인의 통찰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
이렇게 시작해 보거라
무욕(無慾)만 한 탐욕 없습니다.
그것말고
강호제군의
고만고만한 욕망
그것들이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진리입니다.
자 건배
순간의 꽃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12-02-28 (화) 홍승완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에 담긴 시를 읽는 시간은 울림과 침묵의 연속이었습니다.
시인의 ‘다른 시선’을 보며 감탄했습니다.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현상의 뒤를 보고, 사물의 옆을 놓치지 않고, 위에서 상황을 볼 수 있구나.’
그런 몇 개의 시를 아래 옮겨 봅니다.
시와 시의 구분은 ‘*’로 표기했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옷깃 여며라
광주 이천 불구덩이 가마 속
그릇 하나 익어간다
시인의 ‘자유로운 해석’도 놀라웠습니다.
‘아!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구나.
모두가 사연이 있구나.
마음을 열면 보이고 들리는 구나.
세상에 별거 아닌 것들은 없구나.
잠든 정신이야말로 별거 아닌 거구나.’
그런 시 2개 소개합니다.
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 무죄입니다
생각했습니다.
‘다른 시선에서 나와 자유로운 해석으로 응축된 시가 진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만,
그 시들이 괴상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고, 낯선 것을 낯익게 표현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고은 시인은 <순간의 꽃>의 ‘시인이 쓰는 시 이야기’에서
“시쓰기보다 시를 버리는 시간 속에서 그 모순의 힘에 의한 시가 비극적으로 잉태되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답합니다.
“시와 삶 사이의 종종 있는 불화의 되풀이는 결국 다음의 시를 위해서 있어야 할 오르막길 언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뭇 역려(逆旅)인들 어찌 저마다 시의 동산 아니랴.”
* 고은 저, 순간의 꽃, 문학동네,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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