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울고 간다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 아니나 다를까, 문태준이다.
‘말의 탱탱한, 유장한, 서늘한, 그러면서도 유머러스한 행진’의 한 구경꾼이었던 내가
‘혹시 문태준’이라고 떠올렸던 그 짜임새 없는 짐작이 맞아버렸다.
중앙일보는 올 미당문학상 수상작으로 그의 저 시를 올렸다.
나보다 훨씬 젊고 나보다 몹시 뛰어난 사람을 보면, 얕고 좁직한 내 물그릇이 흔들리며 분한 기분이 생겨난다.
출렁거리며, 이 시를 읽노라니 질투가 머리 꼭대기로 올라갈 지경이다.
딱한 시재(詩才)였던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심정을 알겠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말들은 때로 산만하다.
그 산만한 가운데, 내게로 아주 좁고 깊게 흘러온 말이 있었다. 이거다.
단 2-3일 만이라도 아는 것으로부터 그대의 기억으로부터 즐거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대의 가족과 집과 그대의 이름을 버리기 위해,
전혀 이름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는가?
저 말이, 왜 문태준의 ‘가슴 붉은 새’에서 떠올랐을까.
내겐 그걸 읽을 수 있는 광폭의 시야가 없다.
혹시 저 눈 내린 아침에 방문을 열어 제치고 앉아있는 문태준을,
저 문장의 ‘그대’로 바꿔 읽은 건 아니었을까.
문태준은 눈천지로 지워버린 공간에 붉은 새 한 마리를 앉힌다.
흔한 광경일 수도 있을 것을 절대공간으로 바꿔내는 힘은,
그의 간결한 묘사와 행을 건너가는 탄력있는 걸음새에 있는 걸까.
시가 아름다워지기 시작하는 건,
형상과 소리를 더욱 힘 있게 하는 부재(不在)를 돋을 새기면서이다.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울음의 존재’ 자체가 조마조마하다.
순간적이고 작고 여린 존재일수록,
그것의 부재가 크고 강렬한 떨림과 여운을 만들어낸다는 걸 문태준은 꿰뚫고 있다.
누가 울고 간다,는 이제 살아있는 양상 전체의 해석이다.
누가 울고 갔다,가 아니라, 울고 간다.
우린 그걸 못보았거나 보았지만 바빠서 혹은 무심결에 지나쳤다.
여리고 짧은 울음은, 내재화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저렇게 / 울고 / 떠난 사람이 있었다’에서, 주저앉는 기분이 됐다.
빗자루로 쓸어낸 듯한 앞의 시행들이, 저 통속처럼 내려앉는 기억에 맞물려 진저리를 치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저렇게 잠깐 작고 여린 울음으로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저렇게란 마음의 손가락짓으로 문태준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기억을 호명한다.
한 사람은, 상처들이 자글자글하게 이룬 이력서이다.
기억은 메모리칩처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 속으로 번지고 스며들었다.
문태준의 새는, 세상의 모두를 지워버린 자리에, 붉은 가슴의 시인과 붉은 가슴의 새가, 홀연히 만난,
그립게 소통한 흔적이다.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울다’라는 동사가 이렇게 많은 갈래의 뉘앙스로 번져나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울다’의 발견이다.
샤갈의 붓끝이 생각난다.
아주 작은 새의 명낭(鳴囊)에 찍던 붉은 붓을 키워,
새를 보는 사람의 가슴에, 혹은 하늘과 기억 전부에 휘휘 칠하고 있는.
- 중앙일보 이상국기자, 시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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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수런거리는 뒤란''맨발'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수상
☑ 심사평
젊은 시인 문태준의 출현은,
시가 시인에 의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는 말의 향연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어 즐거웠다.
그러나 심사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수상작은 결국 일종의 상대평가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독자적인 절대의 세계로 자신의 개성을 확고하게 구축해온 적잖은 시인들이 양보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진급의 최하림. 김명인 그리고 중견급의 문인수. 김신용 등의 작품도 결코 만만찮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모든 욕심을 비워 이윽고 그 몸 자체가 가볍게 자연과 하나의 지경을 이룬 듯한 최하림의 시는
인생의 서늘한 시간들을 조용히 보여 준다.
그러나 풍경으로서의 자연을 뛰어넘지 않음으로써,
혹은 그 속으로 깊이 침잠하지 않음으로써 시인만의 시적 자아에 비교적 무심한,
표표한 시편들은 어딘가 달관의 수상(隨想)을 즐기는 듯 한 인상이다. 시인에대한 기대가 큰 탓일까, 아쉬움이 남았다.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진정성이 돋보이는 시 세계를 경구적 통찰을 통해 꾸준히 선보인
김명인에 대한 안타까움도 절실하였다.
시적 대상들과 시의 정신사이에 통일감이 더 분명하였으면 이해의 감동이 높았을 것이다.
문인수의 시도 갈수록 진경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특히 사물 하나하나에 쏟는 애정과 그 묘사의 깊이는 탁월하다.
한편 노동자 시인 김신용의 등장은 작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가 충격일 수 있는 것은 한때 지게를 졌고, 지금도 비슷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현실에 있지 않다.
놀라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상당한 상상력과 상징의 교환을 자유롭게 행하고 있는
우수한 시인이라는 사실의 재발견이다.
좀 더 집중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시는 그로 말미암아 매우 넓은 진폭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수상시인 문태준에 대해서는 오직 상찬과 격려만이 필요한 단계이다.
이 젊은 시인의 앞날이 어떤 변모를 보일런지 아무도 알 수 없으나
‘누가 울고 간다’‘가재미’ 연작 등이 보여주고 있는 말의 탱탱한, 유장한, 서늘한, 그러면서도 유머러스한 행진은,
그 맞은 편에 놓여 있는 답답한 일상에 홀연히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특히 동사를 크게 활용하는, 흐르는 상상력이 자기갱신의 힘을 발휘한다.
문태준이라는 서정 시인의 탄생은 우리 시를 위무의 성소(聖所)로 이끄는 언어의 축복이다.
- 심사위원=정현종.홍기삼.김주연.김현자.김기택(대표집필:김주연)
미당ㆍ황순원문학상에 문태준ㆍ김훈 선정
중앙일보사와 계간 ‘문예중앙’이 공동 주최하는 제5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으로
문태준(35) 씨의 시 ‘누가 울고 간다’,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으로 김훈(57) 씨의 단편소설 ‘언니의 폐경’이 선정됐다.
미당ㆍ황순원문학상은
미당 서정주(1914-2000) 시인과 소설가 황순원(1915-2000) 씨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제정했다.
수상작은 지난해 7월부터 올 6월까지
전국 문예지에 발표된 시와 중ㆍ단편소설을 대상으로 6개월여 동안 심사를 벌여 선정했다.
문씨의 ‘누가 울고 간다’는
“프로이트나 니체적 욕망의 내면이 아닌, 진정한 문학의 위반으로 서정시를 되살리는 이 시인의 탄생은
우리 시를 위무의 성소(聖所)로 이끄는 언어의 축복이다”는 평을,
김씨의 ‘언니의 폐경’은
“여동생의 목소리와 시각으로 50대 두 자매가 겪어가는 늙어감, 남편의 떠남, 자식들의 이기심과 배신,
잔잔하지만 분명한 허무감 등을 촘촘하면서도 긴장감 넘치게 교직해내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미당문학상은 3천만원, 황순원문학상은 5천만원의 상금을 준다.
시상식은 10월 28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서소문동 명지빌딩 20층 대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다.(서울=연합뉴스)
<미당 문학상 최종 후보자 명단>
고재종.고형렬.김명인.김신용.나희덕.문인수.문태준.송재학.이재무.최하림 시인(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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