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스트로메리아
파블로 네루다
이 1월달에, 알스트로메리아,
땅 밑에 묻혀 있던 그 꽃이
그 은신처로부터 고지대 황무지로 솟아오른다.
바위 정원에 핑크빛이 보인다.
내 눈은 모래 위의
그 친숙한 삼각형을 맞아들인다.
나는 놀란다.
그 창백한 꽃잎
이빨, 그 신비한 반점을 지닌
완벽한 요람,
그 부드러운 대칭을 이룬 불을 보며---
땅 밑에서 어떻게 준비를 했을까?
먼지, 바위 그리고 재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거기서
어떻게 그건 싹텄을까, 열심히, 맑게, 준비되어,
그 우아함을 세상으로 내밀었을까?
지하의 그 노동은 어땠을까?
그 형태는 언제 꽃가루와 하나가 됐을까?
어떻게 이슬은
그 캄캄한 데까지 스며내려
그 돌연한 꽃은
불의 뜨거운 쇄도처럼 피어올랐을까.
한 방울 한 방울,
한 가닥 한 가닥
그 메마른 곳이 덮일 때까지
그리고 장밋빛 속에서
공기가 향기를 퍼뜨리며 움직일 때까지,
마치 메마르고 황폐한 땅으로부터만
어떤 충만, 어떤 개화,
사랑으로 증폭된 어떤 신선함이 솟아올랐다는 듯이?
1월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제의 메마름을 바라보며, 지금은 수줍게, 생기있게
알스트로메리아의 부드러운
무리가 자라는데;
그리고 한때 돌 많고
메마른 평야 위로
향기로운 꽃의 파도를
물결치며 바람의 배가 지나갈 때.
- 파블로 네루다 시집, 『충만한 힘』 중에서 /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알스트로메리아
〇 학명 : Alstroemeria
〇 원산지 : 브라질
〇 저온성 식물로 꽃의 색깔이 무척 다양하며 화려하고 풍성하다.
꽃이 오래가기 때문에 꽃꽂이, 부케, 절화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수출도 하고 있다.
〇 꽃말 : 배려, 새로운 만남
☑ 시평
바같 풍경이며 사실인 ‘메마르고 황폐한 땅’은
흔히 사람사는 세상의 비유로도 쓰이고 마음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도 쓰이는데,
이 점은 꽃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황무지인데, 거기서 피어있는 꽃들을 발견할 때
경이로워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을 것인가
(이것만은 비열한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거기가 황무지이기 때문에 그 꽃이 ‘돌연한’ 것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권력이나 이익의 맹목적 추구, 목표달성을 위한 자살적, 호전적 접근,
모든 광신들, 몰가치적 생존본능 따위들이 사람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 때,
미의지가 낳은 예술창조나 선의에서 나온 행동에 우리는 감동하게 된다.
‘어떤 충만’이며 ‘어떤 개화’인 그것들은 ‘사랑으로 증폭된 어떤 신선함’ 이라는
명명에 딱 들어맞는 것이니까!
그리하여 ‘장미빛 속에서 공기가 향기를 퍼트리며 움직일 때까지’
피어나는 꽃(마음)은 천혜의 갸륵함으로 가득한 움직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향기로운 꽃의 파도를
물결치며 바람의 배가 지나갈 때
어제의 메마름은 사라지고 생기의 파도가 물결친다
그리고 이 물결의 원천은 세상의 슬픔과 기쁨의 음영으로 물든 시인의 마음이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꽃을 물결치게 하는 바람처럼,
생기의 파도의 원천이고자 하는 시인이 생래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면
이상할 터이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생명의 자발성과 매인 데 없이 움직이는 정신 속에 소용돌이치는
어떤 충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러한 움직임이 만조일 때 노래는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바깥으로부터 제한받거나 억압당할 때는
그러한 억압적 상황을 뚫고 나가는 노래가 또한 씌어지기도 한다
시의 감동은 진정성에서 나오며 진정성의 원천은 물론 가슴이다.
주지적(두뇌적)인 시가 지적 재미를 줄지 모르지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서 가슴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네루다는 가령 엘리엇의 주지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엘리엇은 진짜 시와 가짜 시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기준은 진정성이라고 적적히 말했지만,
그의 시는 감동보다는 지적 재미를 주는 정도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앎이든 느낌(감정)이든 그것이 진짜이려면 모름지기 육화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가슴으로 알고 느낀 것, 또는 내가 곧 그것인 상태의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것이 진정성이 뜻하는 것인 바,
그 진정성의 유무를 스스로 말해주는 것이 작품의 어조이다.
다른 건 재주부리고 꾸며내서 그럴싸하게 보이게 할 수 있으나
어조는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유를 비롯한 비유들도 진정성이 낳은 게 있고
괜히 멋부리느라고 그런 게 있는데,
네루다 시의 비유들은 물론 진정성의 표본이다.
그의 ‘세계의 육체적 흡수’라든지
“(내 시는) 내 육체의 기관이 확장된 것”이라는 말들이 ‘육화’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 피어나는 알스트로메리아처럼
“어떤 충만, 어떤 개화
사랑으로 증폭된 어떤 신선함”을 꽃피우며!
정현종 2007년 봄
엉뚱하게 상상하다
요즘에 입안에서 중얼중얼하는 시구가 하나 있다.
“향기로운 꽃의 파도를/ 물결치며 바람의 배가 지나갈 때.”라는 시구다.
이 시구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 ‘알스트로메리아’의 일부이다.
알스트로메리아는 꽃의 이름이다.
고지대 황무지에 솟은 듯이 핀 꽃을 네루다는 노래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땅 밑에서 “열심히, 맑게, 준비되어,
그 우아함을 세상으로 내밀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꽃핌을 “사랑으로 증폭된 어떤 신선함”이라 불렀다.
“향기로운 꽃의 파도를/ 물결치며 바람의 배가 지나갈 때.”라고 자꾸 말하다 보면
어떤 물결이, 신선함의 흐름이 내 마음에 생겨난다.
그리하여 우울하거나 슬픈 구석이 밀려나고 마음이 환해진다.
마음에 신선함이 깃든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네루다는 마음에 신선함이 많았던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신선함이 엉뚱한 상상에서 생겨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네루다는 아이들이 갖고 있는 호기심과 경이를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아이의 호기심과 경이를 빌려 다음과 같은 멋진 질문들의 시구를 탄생시켰다.
“만월은 오늘밤
그 밀가루 부대를 어디다 두었다지?”라고 썼고,
“바다의 중심은 어디일까?
왜 파도는 그리로 가지 않나?”라고 썼다.
나는 문동만 시인의 새 시집을 읽으면서도 어떤 엉뚱함이라는 것이
삶을 조금은 더 윤택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동만 시인은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나는 장난기 많은 사람이었는데 진지하고 엄숙한 세계로 편입되고 말았다.
(…)
언제나 가벼운 날들을 열망하리라.”라고 썼다.
그리고 시 ‘구르는 잠’을 통해 아이들이 갖고 있는 천진한 장난기와 엉뚱함을 예찬했다.
시는 이렇다.
“아이들은 던진다
돌도 공도 아닌 나뭇잎을
욕도 악다구니도 아닌 나뭇잎을
나는 싸움 구경을 하느라 집에 가지도 못하고
건너편 은행나무에 기대어 물끄러미
바스락거리는 잎과 속닥거리는 입 사이에
누워본다”.
돌이나 공이나 욕이나 악다구니가 아닌 나뭇잎을 던지며 싸우는 아이들의 이 행위는 세상을 해치는 것이 없다.
이 동심의 세계는 재치와 기발함과 재미와 장난이 있을 뿐이다.
마음에 신선함이 있을 뿐이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
삶의 매 순간이 진지하기만 하고 엄숙하기만 하다면 어떨까.
나는 썩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농담을 즐기면서 좀 가볍게 사는 시간이 빛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딴짓 부리는 사람이 때로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바람 부는 날의 나뭇잎 그림자처럼 건들거리는 시간을 살고도 싶다.
또한 낙천주의자들의 활력도 부럽다.
매사에 투덜대기보단 긍정적이고 불평이 적으며
앞으로 일이 잘되어 갈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호감이 간다.
마음의 영역에서 조바심과 걱정과 화를 밀어내고
엉뚱함과 설렘과 호기심과 질문과 신선함의 꽃을 피워보면 어떨까 싶다.
한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가벼이 삶의 시간 속을 불어가면 좋겠다.
향기로운 꽃의 파도를 물결치며 바람의 배가 지나가듯이 말이다.
- 출처 : 중앙일보 Opinion : 마음읽기 2018.07.18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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