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물물이불물어물(物物而不物於物)

by freewind 삶과사랑 2022. 5. 31.
728x90

물물이불물어물(物物而不物於物)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칼럼      2010. 11. 24      이상현

 

 

莊子行於山中, 見大木, 枝葉盛茂, 伐木者止其旁而不取也. 問其故, : “無所可用.” 莊子曰: “此木以不材得終其天年夫!” 出於山, 舍於故人家. 故人喜, 命竪子殺雁而烹之. 竪子請曰: “其一能鳴, 其一不能鳴, 請奚殺?” 主人曰: “殺不能鳴者.” 明日, 弟子問於莊子曰: “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天年; 今主人之雁,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莊子笑曰: “周將處乎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若夫乘道德而浮遊則不然. 无譽无訾, 一龍一蛇, 與時俱化, 而无肯專爲; 一上一下, 以和爲量, 浮遊乎萬物之祖; 物物而不物於物, 則胡可得而累邪! 此神農黃帝之法則也.”

 

- 장자(莊子), 산목(山木)

 

 

장자가 산속을 걸어가다가 한 그루의 거목(巨木)을 발견하였다.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하게 우거졌는데도,

벌목꾼은 그 나무 옆에 그냥 앉아 있을 뿐 벨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장자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쓸모가 없어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자연의 수명을 다할 수가 있구나!”

 

장자가 산에서 내려와서 친구의 집에 들렀다.

친구가 기쁜 나머지 동복(童僕)을 불러서 거위를 잡아 요리하라고 명하였다.

동복이 물었다.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잘 울지 못하는데, 어떤 놈을 잡을까요?”

주인이 말했다. “잘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다음 날에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속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자연의 수명을 누릴 수 있었는데,

지금 주인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시렵니까?”

장자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재()와 부재(不材) 사이에나 있어 볼 거나?

하지만 재와 부재의 사이라는 것이 그럴듯하기는 해도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 누()가 되는 일을 면할 수는 없을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와 덕 위에 올라타고 떠다니며 노닌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

말하자면 칭찬이나 비난도 없이

어떤 때는 용이 되었다가 어떤 때는 뱀이 되었다가 하면서

그때의 상황과 함께 동화된 채 전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어떤 때는 올라갔다가 어떤 때는 내려왔다가 하면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만물의 근원에 마음을 띄우고 노니는 것 말이지.

이렇게 해서 물을 물로 하고 물에 물이 되지만 않는다면,

()가 되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신농씨와 황제가 보여 주었던 처세의 철학이기도 하다네.”

 

 

() 즉 쓸모 있는 것과 부재(不材) 즉 쓸모없는 것의 사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재 아니면 부재일 것이요, 부재 아니면 재일 것이니,

그 사이의 공간을 머릿속으로는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존재할 수가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재로 있다가 화를 당할 것 같으면 얼른 부재의 자리로 몸을 바꾸고,

부재로 있다가 낌새가 이상하면 부리나케 재로 바꾼다?

그렇게 교활하게 처신이라도 해서 화를 피할 수 있을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런 번거로운 과정 속에서 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 것인고.

 

, 불쌍한 인간 존재여.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재앙을 피할 수 없는 가련한 인간의 운명이여.

똑똑한 사람은 똑똑해서 멍청한 사람은 멍청해서,

높은 사람은 높기 때문에 낮은 사람은 낮기 때문에,

강하면 강하다는 그 이유로 약하면 약하다는 그 이유로······.

하여튼 그 누구든 간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이 그물망에 걸려서 부대끼고 신음하며 허우적거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할 것인데,

이것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라면

장자가 제시한 처방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물물이불물어물(物物而不物於物)이라.

장자라는 책 속에는 이런 식으로 똑같은 글자를 몇 번이나 계속 반복하여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면서

기묘한 느낌을 갖게 하는 표현이 이따금씩 튀어 나온다.

종교학적으로 일종의 성현(聖顯)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어쨌든 이런 구절을 접하노라면 한순간 사고가 문득 정지되면서

한참 동안 멍해지기도 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 뜻을 찬찬히 음미해 보노라면

불현듯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깊은 사색의 늪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도 된다.

이것이 어쩌면 한문이 갖고 있는 묘미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흡사 주문(呪文)과 같은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직역을 한다면

물을 물로 하고 물에 의해 물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될 듯도 한데,

이것을 다시 약간 부연해서 설명해 본다면,

물을 물로 부리면서 주재(主宰)를 하고 물에 의해 물로 부림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 되지는 않을는지.

말하자면 외부의 환경에 피동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고서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물이란 하나의 물건이나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외물(外物)을 가리키는 말일 게다.

외물은 나 이외의 모든 객관 대상을 뜻하는 용어이다.

우리가 물아(物我)라는 말을 곧잘 쓰기도 하는데,

이것은 곧 주객(主客)이라는 말로 환치(換置)할 수도 있다.

주객이란 문자 그대로 주인과 손님이라는 뜻이니,

그렇다면 이 물이라는 것은 바로 외물로서 나에게 찾아오는 일체의 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물을 물로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아(自我)요 주인이다.

 

손님이란 홀연히 찾아왔다가 언젠가는 떠나가는 나그네이다.

그것이 비록 빠르고 늦은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나라고 하는 집의 문을 두드리는 길손은 다양하다.

반갑고 기분 좋은 데도 자리에서 바삐 일어나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얄궂고 기분 나쁜데도 오래 머무는 객들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고객도 있을 것이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위시해서 팔만사천 번뇌(煩惱)와 같은 것도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손님들을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일까.

 

 

장자는 말한다.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되, 物物!

즉 어디까지나 주인 의식(主人意識)을 견지해야 할 것이요,

不物於物! 즉 손님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함께 휩쓸린 나머지 주인의 체통을 잃는 일은 하지 말라고.

재앙이나 환란과 같은 것도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하는 손님이라면,

일단 정중하게 맞이하고서 의연하게 대처를 하시라고.

문제는 외물이 아니라, 그 외물을 대하는 우리의 주체성(主體性)이 관건이라고.

 

그리고 장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도 하다.

사람들이여 그렇게만 한다면 그 손님들이 어떻게 주인인 그대에게 누()를 끼칠 수 있으리오.

그것이 비록 누구에게나 마지막으로 한번은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마련인 죽음이라는 손님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오.

그렇지만 결코 두려워하지들 마시오.

사실 주인이란 어디에서 오지도 않았고 어디로 떠나는 존재도 아니니까…….”

 

그런데 장자 선생이여!

선생의 말씀이 그럴듯하기는 하오마는,

손님들과 어울리다 보면 주인 역시 자신도 모르게 함께 휩쓸리게 되는 것이야말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도대체 선생은 선생의 말처럼 행하면서 전혀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과연 몇 명이나 보셨소이까?

아니, 선생 자신은 실제로 그렇게 할 자신이 있기나 한 것인지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소생은 의심스럽소이다.

그러자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장자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자아가 무엇인지, 내 속의 참 주인이 어떤 존재인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겠지요.

그것은 언어와 문자로 드러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래도 내가 뭔가 암시를 던져 주기도 했었지요.

이를테면 좌망(坐忘)이라든가 심재(心齋)라든가 조철(朝撤)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외다.

한 번 시도해 보시구려.

가령 선종(禪宗)에서 견성(見性)을 하기 위해 용맹정진하며 참선을 하는 것도

사실은 나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니까요

 

 

 

글쓴이 / 이상현

 

* 전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역서

현종실록, 명종실록, 선조실록, 인조실록, 정조실록, 중종실록, 광해군일기 등 조선왕조실록

계원필경집, 고운집, 간이집, 계곡집, 목은집,

 

상촌집, 택당집, 포저집, 가정집 등 문집 다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