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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교토삼굴[狡兎三窟]

by freewind 삶과사랑 2022.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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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삼굴[狡兎三窟]

 

 

요지

 

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교묘한 지혜로 위기를 피하거나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

(: 교활할 교, : 토끼 토, : 석 삼, : 구멍 굴)

 

 

내용

 

사기(史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풍환(馮驩)은 제()나라의 재상(宰相)인 맹상군의 식객(食客)이었다.

맹상군은 왕족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의 아들로 이름은 전문(田文)이고,

맹상군은 그의 호이다.

풍환은 본디 거지였는데 맹상군이 식객을 좋아한다는 말에

짚신을 신고 먼 길을 걸어왔던 자다.

맹상군은 그의 몰골이 하도 우스워 별 재주는 없어 보였지만 받아주었다.

 

그러나 그는 괴짜였다.

맹상군은 그를 3등 숙소(宿所)에 배치했는데 고기반찬이 없다고 늘 투덜댔다.

그래서 2등 숙소로 옮겨 주었는데 이번에는 수레가 없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1등 숙소로 옮겨 주자 그럴 듯한 집이 없다며 투덜댔다.

 

당시 맹상군은 설(:현재 山東省 동남지방)1만 호의 식읍을 가지고 있었다.

3천 명의 식객을 부양하기 위해 식읍 주민들에게 돈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구를 보내 독촉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1년간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일관(一貫)했던 풍환이 자청했으므로 그를 보내기로 했다.

출발할 때 그는 빚을 받고 나면 무엇을 사올까요?” 하고 물었다.

맹상군은 무엇이든 좋소. 여기에 부족한 것을 부탁하오.”라고 대답하였다.

 

설에 당도한 풍환은 빚진 사람들을 모아서 차용증을 하나하나 점검한 후

이자만 해도 10만 전을 받았다.

예상 외의 좋은 결과였다.

징수가 끝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맹상군은 여러분의 상환 노력을 어여삐 보고 모든 채무를 면제하라고 나에게 분부하셨소.”

그리고는 모아 놓았던 차용증 더미에 불을 질렀다.

차용증은 모두 재로 변하고, 사람들은 그의 처사에 감격해 마지 않았다.

설에서 돌아온 풍환에게 맹상군이 선생은 무엇을 사오셨는가?” 하고 물어 보았다.

이때 풍환이 말하기를

차시풍환왈 군지부족즉은의야 이소차서위군매은의래

(此時馮驩曰 君之不足則恩義也 以燒借書爲君賣恩義來 : 당신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 은혜와 의리입니다.

차용증서를 불살라 당신을 위해 돈주고 사기 힘든 은혜와 의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라 하였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맹상군은 매우 마땅찮은 기색이었다.

 

1년 후 맹상군이 제나라의 새로 즉위한 민왕(泯王)에게 미움을 사서 재상직에서 물러나자,

3천 명의 식객들은 모두 뿔뿔이 떠나버렸다.

풍환은 그에게 잠시 설에 가서 살라고 권유했다.

맹상군이 실의에 찬 몸을 이끌고 설에 나타나자 주민들이 환호하며 맞이했다.

맹상군이 풍환에게 말했다.

선생이 전에 은혜와 의리를 샀다고 한 말뜻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소.”

교활한 토끼는 구멍을 세 개나 뚫지요[狡兎三窟].

지금 경()께서는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직 고침무우(高枕無憂: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없이 잠.)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경을 위해 나머지 두 개의 굴도 마저 뚫어드리지요.”

 

그래서 그는 위()나라의 혜왕(惠王)을 설득하여 맹상군을 등용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실현할 것이며 동시에 제나라를 견제하는 힘도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마음이 동한 위의 혜왕이 금은보화를 준비하여 세 번이나 맹상군을 불렀지만

그 때마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응하지 말 것을 은밀히 권했다.

 

이 사실은 제나라의 민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아차 싶었던 민왕은 그제서야 맹상군의 진가를 알아차리고 맹상군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다시 재상의 직위를 복직시켜 주었다.

두 번째의 굴이 완성된 셈이다.

 

두 번째의 굴을 파는데 성공한 풍환은 세 번째 굴을 파기 위해 제민왕을 설득,

설 땅에 제나라 선대의 종묘를 세우게 만들어

선왕(先王) 때부터 전승되어 온 제기(祭器)를 종묘에 바치하도록 했다.

선대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는 한 설혹 제왕의 마음이 변심한다 해도

맹상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이것으로 세 개의 구멍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주인님은 고침안면 하십시오.”

 

이리하여 맹상군은 재상에 재임한 수십 년 동안 별다른 화를 입지 아니했는데

이것은 모두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세 가지 보금자리를 마련한 덕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풍환을 戰國策》〈제책편(齊策篇)에서는 풍훤(馮諼)’으로 적고 있다.

 

이 고사는 불안한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로,

완벽한 준비 뒤에는 뜻하지 않는 불행은 찾아오지 않는다.

 

 

 

참조항목

 

유비무환, 고침안면

 

중국상하오천년사 : 교토삼굴 [狡兎三窟]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은 전문(田文)으로, 제나라의 귀족이다.

그는 신릉군(信陵君), 평원군(平原君),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전국 사공자(戰國四公子)’라고 불렸다.

사공자는 재능 있는 현사들을 좋아해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재워주고 먹여주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식객(食客)’이라고 했다.

그들은 각기 수천 명의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맹상군의 식객이 가장 많았다.

 

 

제나라에 풍훤(馮諼)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집이 매우 가난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맹상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식객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청했다.

맹상군은 두말없이 그를 받아들였지만,

다른 식객들은 아무 재주도 없는 사람이라고 얕보며 잡곡밥에 푸성귀만 주면서 음식 대접을 소홀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풍훤은 대청 기둥에 기대어 앉아 검을 박자에 맞춰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장검아, 장검아, 이제는 돌아가자. 물고기도 먹을 수 없으니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냐.”

 

그것을 본 맹상군은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에게도 물고기를 대접하게. 다른 식객들처럼 잘 대접해 주게.”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풍훤은 또 기둥에 기대어 앉아 노래를 불렀다.

장검아, 장검아, 돌아가자. 밖에 나가는데 수레가 없으니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냐.”

 

그 말을 들은 맹상군은 아랫사람들에게 말했다.

풍원도 다른 식객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게. 그가 밖으로 나갈 때 수레를 내주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풍훤은 또 노래를 불렀다.

장검아, 장검아, 돌아가자. 여기서는 노인을 봉양할 수 없으니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냐.”

 

그 노래를 들은 맹상군은 아랫사람들에게 분부해 그의 어머니에게 매일 세 끼의 음식을 보내게 했다.

그 다음부터는 풍훤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맹상군은 풍훤에게 설읍(薛邑)에 가서 빚을 받아오라고 했다.

떠날 때 풍훤이 물었다. “빚을 다 받으면 무엇을 사올까요?”

 

 

우리 집에 무엇이 부족한가를 보고, 부족한 것을 사오게.”

 

설읍에 도착한 풍훤은 빚을 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채무를 하나하나 대조해 보게 했다.

그러고는 맹상군이 빚을 탕감해 주기로 했다며 선포하고는, 빚 문서들을 사람들이 보는 데서 불태워버렸다.

백성들이 맹상군에게 감사해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튿날 풍훤은 도성으로 돌아왔다.

맹상군은 빨리 돌아온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며 이렇게 물었다. “빚은 다 받아왔는가?”

 

, 다 받았습니다.”

그럼 무엇을 사왔는가?”

분부대로 공자님의 댁에 없는 것을 사왔습니다.

소인이 보건대 공자님의 댁에는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오직 ()’가 부족한 것 같아서 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맹상군이 어리둥절해하자 풍훤이 말을 보탰다.

소인은 공자님의 허락도 없이 사사로이 공자님의 결정이라고 꾸며, 그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빚 문서도 전부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같이 공자님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소인은 공자님에게 를 사왔습니다.”

 

맹상군은 속으로는 몹시 언짢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 후에 제나라 민왕(泯王)이 맹상군의 직위를 파면시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봉읍지인 설읍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설읍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1백 리 밖까지 나와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광경을 본 맹상군은 크게 감동했으며 풍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자네가 사왔다는 를 이 눈으로 보게 되었네.”

 

그러자 풍훤은 이렇게 대답했다. “꾀 있는 토끼들은 굴을 세 개씩 파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설읍은 굴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굴 하나로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소인이 굴 두 개를 더 파놓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물론 맹상군은 찬성했다. 풍훤은 양()나라로 가서 혜왕(慧王)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나라 대신 맹상군은 임금에게 쫓겨나 국외에 있습니다. 맹상군은 재능 있고 덕이 높은 분입니다.

그를 등용하는 나라는 반드시 강성해질 것입니다.”

 

혜왕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사신더러 수레 1백 대와 황금 1천 근을 갖고 설읍으로 가서 맹상군을 데리고 오도록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민왕은 무척 놀랐으며,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그는 즉시 태자의 스승에게 황금 1천 근과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 자신의 보검,

잘못을 사과하는 문서를 가지고 설읍으로 가서 맹상군을 데리고 오도록 했다.

맹상군은 재상 일을 보겠다고 하면서,

풍훤의 조언을 따라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제사 기물들을 설읍에도 얼마간 나눠주어 종묘를 세우게 해 달라고 했다.

민왕은 그 요구를 즉시 들어주었다.

이리하여 맹상군은 수십 년 동안 아무런 위협이나 화액을 당하지 않고 순조롭게 제나라 재상을 지냈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이란 꾀 있는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놓는다.’는 뜻으로, 바로 맹상군의 이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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