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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

결국 제 갈 길을 간다

by freewind 삶과사랑 2023.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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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 갈 길을 간다

 

이희중

 

 

어느 저녁 당신이 친구들과 질펀한 술자리에서 주량에 넘치는 술을 마시고

어깨동무를 풀기 싫어 밤새 한 몸으로 비틀거렸다 한들,

좋은 계절 당신과 그들의 찬란한 여행은 계속되고

한 아궁이에서 지은 여러 끼니를 나누어 먹으며

낯선 풍물에 똑같이 놀란 후 단체 사진을 수없이 찍으며

각별한 우애를 다졌다 한들,

개 중 몇이 당신과 고향이 같거나 다닌 학교가 같음을 우연히 알아

평생 같은 편인 운명을 단단히 믿으며

수시로 밀담과 음모를 나누었다 한들,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를 똑같이 좋아하는 어떤 친구가

애초부터 자신과 같은 사람임을 섬광처럼 느꼈다 한들,

추운 날 따스한 잠자리가 아쉽던 당신이

또 어떤 친구와 한방에 들어 옷 속에 숨긴 몸을 다 꺼내

귀한 따듯함을 나누었다 한들,

같은 일을 꿈꾸며 같은 일로 앓으며

마침내 꿈꾸던 일을 다 이루어 이들과 함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사람 좋은 당신이 한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들,

 

 

당신과 사람들 사이의 무엇이 오래갈 텐가

결국, 뿔뿔이 제 갈 길을 가야 하지

술이 깨면 조각난 기억을 뒤지며

지난밤의 실수를 걱정해야 하고

여행이 끝나면

어느 길목에선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야 하고

밝아버린 잠자리를 둘러보며

버릴 것과 간직할 것을 가려야 하고

밀담과 농담의 틈을 들여다보아야 하고

영화나 노래 따위는 삶이란 톱질 끝에 흐른 톱밥임을

게다가 남의 톱밥일 뿐임을 깨달아야 하고

결국, 어느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무엇이 당신에게 남는다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하지

 

 

도대체 당신이 지금까지,

당신이 아주 오래전 말할 수 없이 작은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들의 세계로 드는 문지방을 힘겹게 넘을 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과 고요와 후텁지근함과 축축함과 외로움에서 얼마나 멀리 도망쳐왔는가

유감스럽게 당신에게는 혼자 걸어가야 할,

어둡고 고요하고 후텁지근하고 축축하고 외로운 길이

적어도 그만큼 남아 있지 삶은 결국 그런 것

결국, 당신은 찍소리 못하고 제 길을 가야 하는 거지

그 슬픈 미래를 될 수 있으면 더 늦게까지 잊고 살았으면 하고 고작 바랄 뿐이지.

 

 

- 출처 : 이희중 시집 참 오래 쓴 가위문학동네 2002 -

 

 

 

 

 

* ~ 알면서도

차마 발설하지 않은 말들.

차마 발설하기 싫은 말들.

 

* 그러나 ~

찍소리 못하고 제 길을 가야 하는

다 같이 슬픈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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