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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76

벗 하나 있었으면 벗 하나 있었으면 도종환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흙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2023. 2. 5.
다 바람 같은 거야 다 바람 같은 거야 묵연스님 다 바람 같은 거야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니?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순간이야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야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야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돌지 다 바람이야 이 세상에 온 것도 바람처럼 온다고 이 육신을 버리는 것도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야 가을 바람 불어 곱게 물든 잎들을 떨어뜨리듯 덧없는 바람 불어 모든 사연을 공허하게 하지 어차피 바람일 뿐인걸 굳이 무얼 아파하며 번민하리 결국 잡히지 않는 게 삶인 걸 애써 무얼 집착하리 다 바람인 거야 그러나 바람 그 자체는 늘 신선하지 상큼하고 새큼한 새벽바람 맞으며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2023. 1. 29.
눈 덮인 마을 눈 덮인 마을 신위 나이 들어 시를 쓰매 좀스러운 일은 다 버렸어라 잠이 적어지니 지난 일들 꿈꾸기 어려운데 겨우내 맨밥을 먹고 소금기마저 지웠어라 대나무를 꺾지 않으려 바람은 섬돌을 울리고 책을 읽으라 흰눈을 처마를 비추네 흰눈 속에 아늑히 묻힌 집들 그리고 싶어 정자 위에 올라 오래오래 바라보네 - 출처 : 곽재구,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중에서 ☐ 신위 申緯 조선 후기의 시인, 서화가, 호는 자하紫霞.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이름이 높았으며, 추사 김정희와 오랜 교분을 나누었다. ☑ Comment by 곽재구 일지암의 여연스님과 밤새 설아차를 마시다. 한 해가 저무는 창밖에는 펑펑 흰 눈이 쌓이는데, 등불인 듯 손을 모아 한 모금 깊게 차를 마시니 춥고 쓰리고 막막한 세상의 기운들이 문득 .. 2023. 1. 28.
결국 제 갈 길을 간다 결국 제 갈 길을 간다 이희중 어느 저녁 당신이 친구들과 질펀한 술자리에서 주량에 넘치는 술을 마시고 어깨동무를 풀기 싫어 밤새 한 몸으로 비틀거렸다 한들, 좋은 계절 당신과 그들의 찬란한 여행은 계속되고 한 아궁이에서 지은 여러 끼니를 나누어 먹으며 낯선 풍물에 똑같이 놀란 후 단체 사진을 수없이 찍으며 각별한 우애를 다졌다 한들, 개 중 몇이 당신과 고향이 같거나 다닌 학교가 같음을 우연히 알아 평생 같은 편인 운명을 단단히 믿으며 수시로 밀담과 음모를 나누었다 한들,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를 똑같이 좋아하는 어떤 친구가 애초부터 자신과 같은 사람임을 섬광처럼 느꼈다 한들, 추운 날 따스한 잠자리가 아쉽던 당신이 또 어떤 친구와 한방에 들어 옷 속에 숨긴 몸을 다 꺼내 귀한 따듯함을 나누었다 한.. 2023. 1. 15.
참나무(The Oak) 참나무(The Oak) 알프레드 테니슨 젊거나 늙거나 저기 저 참나무같이 네 삶을 살아라 봄에는 싱싱한 황금빛으로 빛나며 여름에는 무성하지만 그리고, 그리고 나서 가을이 오면 더욱 더 맑은 황금빛이 되고 마침내 나뭇잎 모두 떨어지면 보라, 줄기와 가지로 나목 되어 선 발가벗은 저 '힘'을 The Oak Live thy life, Young and old, Like yon oak, Bright in spring, Living gold; Summer-rich Then; and then Autumn-changed, Soberer hued Gold again. All his leaves Fall’n at length, Look, he stands, Trunk and bough, Naked strength. ※ .. 2023. 1. 8.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 서서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Whose woods there are I think I know.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To ask if there is s.. 2023. 1. 1.
튀밥에 대하여 튀밥에 대하여 안도현 변두리 공터 부근 적막이며 개똥무더기를 동무삼아 지나가다 보면 난데없이 옆구리를 치는 뜨거운 튀밥 냄새 만날 때 있지 그 짓하다 들킨 똥개처럼 놀라 돌아보면 망할 놈의 튀밥장수, 망하기는커녕 한 이십 년 전부터 그저 그래 왔다는 듯이 뭉개 뭉개 단내 나는 김을 피워 올리고 생각나지, 햇볕처럼 하얀 튀밥을 하나라도 더 주워 먹으려고 우르르 몰리던 그때, 우리는 영락없는 송사리 떼였지. 흑백사진 속으로 60년대며 70년대 다 들여보내고 세상에 뛰쳐나온 우리들 풍문으로 듣고 있지. 지금 누구는 나무를 타고 오른다는 가물치가 되었다 하고 누구는 팔뚝만한 메기가 되어 진흙탕에서 놀고 또 누구는 모래무지 되고 붕어도 잉어도 되었다는데 삶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제대로 나는 가고 있는지 가령 쌀.. 2022. 12. 24.
호수와 단풍나무 호수와 단풍나무 제인 허쉬필드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싶다 사흘 동안 아낌없이 불타고 불타는 그리고 이틀을 더 불타다가 모든 잎을 떨어뜨리는 이 단풍나무처럼 검푸른 깊이 속으로 무엇이 오든 받아들이고 다시 돌려주는 이 호수처럼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 고요한 마음속에서 세상은 다시 태어난다 두 개의 지구가 돌고 두 개의 하늘이 있고 두 마리의 왜가리가 하강하며 하나가 된다 물고기조차 한순간 둘이 되었다가 사라진다 그 물고기이고 싶다 비가 오면 모든 것을 잃었다가 되돌아오는 그 투명함이고 싶다 가장자리에 핀 꽃 때문에 얕은 모래들에 속아 걸어 들어가는 모든 것은 빠져야만 하는 늪이고 싶다 그 빠져듦이고 싶다 날이 어둑해졌을 때만 은밀하게 목을 축이러 오는 자이고 싶다 그리고 삼켜지는 자이고 싶다 눈 없이.. 2022. 11. 26.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 2022. 11. 20.
11월 11월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시집 『뿌리에게』 (창비, 1991) 2022. 11. 19.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Life Is Made Up of Little Things Mary R. Hartman Life’s made up of little things, No great sacrifice of duty, But smiles and many a cheerful word Fill up our lives with beauty. The heartaches, as they come and go Are but blessings in disguises, For time will turn the pages o'er And show us great surprises.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메리 R 하트먼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위대한 희생이나 의무가 아니라 미소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우리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네... 2022. 11. 13.
단풍 드는 날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2022. 11. 12.